데살로니가전서 04:13-05:11 종말에 대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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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안에 퍼진 죽은 성도들에 대한 염려와 종말의 때에 대한 혼란을 바로잡습니다. 그는 먼저, 주 안에서 죽은 자들(자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시 결코 소외되지 않고, 오히려 살아남은 자들보다 먼저 부활하여 주님과 영원히 함께하게 될 것이라는 확고한 소망을 선포하며 서로 위로할 것을 권면합니다(4:13-18). 이어서 주의 재림의 때와 시기는 아무도 알 수 없으며, 마치 밤의 도둑같이 예기치 않게 임할 것임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둠에 속한 자들처럼 방심하거나 잠자지 말고, 빛의 자녀답게 늘 깨어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촉구합니다(5:1-6). 마지막으로, 이 깨어 있는 삶의 구체적인 모습은 바로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과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고 살아가는 것임을 밝히며, 서로를 격려하고 덕을 세우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것을 당부합니다(5: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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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3-18 죽은 자들의 부활: 슬픔을 이기는 소망
하나님은 죽음을 끝으로 여기는 세상의 절망 속에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재회의 확실한 소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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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떠난 후,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 가운데 죽는 이들이 생기자, 살아남은 이들은 그들이 주님의 재림의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며 깊은 슬픔에 빠졌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은 슬픔을 경계하며, 부활에 대한 분명한 진리를 가르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믿는다면,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잠든 성도들 또한 하나님께서 재림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데리고 오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주의 강림 시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져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우리는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 확실한 약속의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명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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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소망 없는 슬픔 vs. 소망 있는 슬픔 : 당시 헬라-로마 세계관은 죽음을 돌이킬 수 없는 끝, 허무로 여기는 비관론이 팽배했습니다. 수많은 묘비명에는 "나는 없었다. 나는 있었다. 나는 이제 없다.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Non fui, fui, non sum, non curo)"와 같은 허무주의적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슬픔이 이와는 본질적으로 달라야 함을 역설합니다. 성도의 슬픔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인간적인 아픔을 부정하지 않지만, 부활과 영원한 재회라는 확실한 소망에 뿌리내리고 있기에 절망으로 치닫지 않는 '소망 있는 슬픔'입니다.
_자는 자들(κοιμωμένων) : 바울은 성도의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이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의 평안한 안식이자 영광스러운 아침(부활)을 기다리는 일시적인 과정임을 시사합니다. 이 비유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완화하고, 평안과 소망의 관점을 제시합니다.
_부활의 본질 - 새로운 창조 : 기독교의 부활은 단순히 죽었던 몸이 이전의 상태로 되살아나는 '소생'이 아닙니다. 그것은 썩어질 몸을 벗고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는 '새로운 창조'입니다. 이는 마치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과 같은 질적인 변화입니다. 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분께 속한 모든 성도는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서는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_서로 위로하라(παρακαλεῖτε) : 바울은 부활의 교리를 단지 지적 동의의 대상으로 제시하지 않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세워주는 구체적인 실천으로 연결합니다. 교리는 삶과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특히 부활의 소망은 슬픔에 잠긴 형제자매의 눈물을 닦아주고, 죽음의 절망 앞에서 함께 손잡고 일어설 수 있게 하는 실제적인 능력입니다. 장례식과 추모의 자리에서 교회는 이 부활의 소망을 선포하며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위로를 나누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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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냈을 때, 나의 슬픔은 세상의 슬픔과 어떻게 달랐습니까? 부활의 소망이 나의 일상에, 특히 고난과 상실의 순간에 실제적인 위로와 힘이 되고 있습니까?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은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옵니까? 이 부활 신앙은 오늘을 살아가는 나에게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게 하고, 유한한 삶에 얽매이지 않고 영원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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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6 주의 날: 깨어 있는 삶의 긴급성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로서,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당신의 때에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당신의 나라를 완성하실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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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소망에 이어, 바울은 주님의 재림, 즉 '주의 날'의 때와 시기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쓸 말이 없다고 말하는데, 이는 성도들이 이미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를 줄'을 자세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말하며 방심하고 있을 그때, 마치 임신한 여인에게 해산의 고통이 갑자기 찾아오듯 멸망이 홀연히 임할 것이며 아무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어둠에 속한 자들이 아니므로, 그 날이 도둑같이 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둠에 속한 다른 이들과 같이 잠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강력하게 촉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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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때와 시기(χρόνων καὶ τῶν καιρῶν) :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 바 아니요"(행 1:7)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종말의 구체적인 시점을 계산하고 예측하려는 모든 시도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월권행위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관심을 '언제인가?'라는 호기심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실존적 결단으로 전환시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때를 아는 것이 아니라, 언제 오시더라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_밤의 도둑같이 : 이 비유는 주의 날의 '돌발성'과 '예측 불가능성'을 강조합니다. 세상은 스스로의 힘으로 '팍스 로마나(Pax Romana)'와 같은 평화와 안전을 구축했다고 자만하지만, 인간이 만든 모든 안정의 체계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순식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허상임을 경고합니다.
_빛의 아들 vs. 어둠의 자식 : 바울은 쿰란 공동체의 문헌에서도 발견되는 빛과 어둠의 이원론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분명히 합니다. 성도는 더 이상 죄와 무지의 어둠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 거하는 '낮의 아들'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은 어둠의 일들, 즉 방탕과 무감각을 버리고, 빛의 자녀다운 거룩하고 분별력 있는 삶이어야 합니다.
_깨어 정신을 차릴지라(γρηγορῶμεν καὶ νήφωμεν) : '깨어 있으라'는 것은 영적인 민감성과 분별력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하며, '정신을 차리라'는 것은 술 취하지 않은 냉철함, 즉 세상의 가치관에 취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명확히 인식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종말을 기다리는 성도의 기본적인 삶의 태도이며, 열광주의나 나태함이라는 양극단을 모두 경계하는 균형 잡힌 긴장감을 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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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적으로 깨어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안락함과 분주함 속에서 영적으로 잠들어 있습니까? "평안하다, 안전하다"는 세상의 소리가 나의 영혼을 마비시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깨어 있는 삶'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매일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도로 주님과 교제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삶입니다. 세상의 문화와 가치관을 무분별하게 따르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진리의 빛 아래에서 분별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깨어 있는 '낮의 아들'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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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11믿음, 소망, 사랑: 종말을 사는 성도의 영적 무장
하나님은 우리를 진노의 심판이 아닌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고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셨으며, 우리가 깨어 있든지 자든지 항상 주님과 함께 살게 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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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낮에 속한 성도들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영적 무장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것은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가슴막이)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우신 것은 진노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깨어 있든지 자든지(살아 있든지 죽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 놀라운 복음의 진리 위에 서서, 성도들은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계속해야 한다고 바울은 마지막으로 권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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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영적 갑옷 : 바울은 여기서 로마 군인의 갑옷 이미지를 사용해 성도의 영적 무장을 설명합니다(이는 훗날 에베소서 6장에서 더 상세하게 발전합니다).
-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 : 호심경은 심장과 같은 가장 중요한 내부 장기를 보호합니다. 믿음(하나님을 향한 신뢰)과 사랑(이웃을 향한 실천)은 우리의 마음, 즉 감정과 의지의 중심을 세상의 불신과 미움, 이기심으로부터 지켜주는 핵심적인 방어구입니다.
- 구원의 소망의 투구 : 투구는 머리, 즉 생각과 정신을 보호합니다. 구원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소망은 종말의 혼란과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우리의 생각을 지켜주고, 사탄이 심는 의심과 두려움의 공격을 막아내는 역할을 합니다.
_구원의 확신 : 이 영적 무장의 근거는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구원의지에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행위나 자격이 아닌,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담대하게 종말의 시대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_서로 덕을 세우라(οἰκοδομεῖτε) : '덕을 세우다'라는 말의 원어는 '집을 짓다, 건축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교회가 그리스도를 머릿돌로 하여 함께 지어져 가는 거룩한 건물임을 시사합니다. 공동체는 서로를 격려하고(권면하고), 서로의 믿음을 굳건하게 세워주는(덕을 세우는)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함께 성장해 갑니다.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에게 개인적인 경건뿐 아니라, 이처럼 서로를 돌아보고 세워주는 공동체적 삶이 필수적임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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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 믿음과 사랑, 소망이라는 영적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습니까? 세상의 염려와 유혹이 나의 마음을 공격할 때,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은 나를 굳건히 지켜주고 있습니까? 미래에 대한 불안과 절망이 엄습할 때, 구원의 소망이라는 투구가 나의 생각을 보호하고 있습니까? 이 영적 싸움은 결코 혼자 할 수 없습니다. 나는 공동체 안에서 형제자매들을 권면하고 그들의 믿음을 세워주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또한, 다른 지체들의 격려와 도전을 통해 나의 믿음이 세워지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까? 종말의 시대일수록 우리는 더욱 모이기를 힘쓰고, 서로를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함께 믿음의 집을 지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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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부활과 종말의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경험케 하시고 입게 하시고 소망케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셔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부르실 때에
그곳에서 항상 주님과 함께하길 원하오며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을 기억하며
어려움 속에서도 부활의 소망으로 위로얻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와 시기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음을 알고
빛의 자녀요 낮의 자녀로서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않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리며 종말을 준비하는 삶을
성실하게 잘 감당하게 하옵소서.
주님이 허락하신 믿음과
베풀어 주신 사랑을 품고
뜻하신대로 구원의 소망을 기억하면서 살게 하옵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사 항상 함께 하시기 원하시는 뜻을 따라
날마다 주님을 바라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피차 권면하고 서로 사랑하며 덕을 세우면서
그렇게 함께 몸된 교회와 공동체를 섬기며
그렇게 거룩한 삶을 이어가기 원합니다.
부활의 소망으로 깨어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피차 권면하고 덕을 세우는 온전한 삶을 이어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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