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04:01-1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by 평화의길벗 posted Sep 0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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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04:01-1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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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복음의 능력으로 믿음의 공동체로 굳건히 서 가고 있는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해, 사도 바울은 이제 그들의 삶을 더욱 깊은 차원으로 이끌어갑니다. 그는 주 예수 안에서 성도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권면을 제시합니다. 그 핵심은 세 가지 영역, 즉 개인의 삶에서의 '거룩',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 그리고 세상 속에서의 '성실한 일'입니다. 이 세 가지는 분리된 덕목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구성하는 유기적인 전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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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절 거룩 : 구별된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

하나님은 우리를 부정함이 아닌 거룩함으로 부르시고, 그 거룩한 삶을 살아낼 수 있도록 자신의 영(성령)을 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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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주 예수 안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이미 가르쳤고, 데살로니가교회가 이를 잘 배우고 행하고 있음을 칭찬하며 더욱 힘쓰라고 격려합니다. 주 예수의 권위로 준 이 명령의 핵심은 바로 "너희의 거룩함"입니다. 바울은 이 거룩함을 당시 헬라-로마 문화 속에서 가장 큰 도전이었던 성(性)적인 영역에 구체적으로 적용합니다. 거룩함은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 아내를 대하며(또는 자기 몸을 다스리며),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이 일에 분수를 넘어 형제를 해하지 않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러한 성적인 죄악에 대해 주님께서 반드시 신원(伸冤,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부정함이 아니라 거룩함에 있으며, 이 거룩함의 가르침을 저버리는 것은 사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룩의 능력이 되시는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중대한 일임을 경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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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하나님의 뜻, 거룩(ἁγιασμός) :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는 선언은 기독교 윤리의 대헌장과 같습니다. '거룩'은 단순히 도덕적 깨끗함을 넘어, '구별됨'을 의미합니다. 이는 세상의 가치관과 방식으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의 소유로 온전히 드려진 상태를 말합니다. 바울이 성적인 문제를 가장 먼저 다루는 이유는, 당시 데살로니가에 만연했던 디오니소스 컬트(Dionysus cult)와 같은 신비 종교들이 광란적인 축제와 성적인 문란함을 종교적 행위의 일부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에게 세상의 음란한 문화는 가장 현실적이고 강력한 유혹이었습니다. 따라서 성적 순결은 세상으로부터의 구별됨을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시금석이었습니다.

_몸의 신학 :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라는 구절은 원어(τὸ ἑαυτοῦ σκεῦος κτᾶσθαι)의 의미상 "자신의 몸(vessel)을 다스릴 줄 알고"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는 고대 헬라 철학의 이원론적 사고, 즉 영혼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거나 비천하다는 사상에 대한 강력한 반박입니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 몸은 영혼의 감옥이 아니라,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고전 6:19)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의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몸을 존귀하게 여기고, 욕망의 노예가 아닌 성령의 다스림 아래 두어야 합니다.

_성령과 거룩 : 8절의 경고는 매우 엄중합니다. 거룩한 삶의 명령을 저버리는 것은 단지 윤리적 실패가 아니라,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당신의 영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거룩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으로 응답하는 과정입니다. 이를 저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 자체를 모독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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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음란한 문화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거룩'은 어떻게 가능한가요? 그것은 단순히 유혹을 피하는 소극적 자세를 넘어, 나의 몸과 성(性)을 하나님의 거룩한 선물로 인식하고 존귀하게 다루는 적극적인 결단에서 시작됩니다. 나의 생각과 시선, 관계를 성령의 다스림 아래에 두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특히 가정 안에서 부부 관계가 거룩함과 존귀함에 기초하고 있는지, 아니면 세상처럼 자기중심적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변질되지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거룩을 향한 우리의 매일의 작은 싸움이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 예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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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0절 사랑 : 서로를 향한 실천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서로 사랑하는 법을 친히 가르치시며, 그 사랑의 실천을 통해 당신의 성품을 세상에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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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형제 사랑(φιλα δελφία)에 관해서는 더 쓸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이미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θεο δίδακτοί)' 서로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사랑은 교회 내부에만 머무르지 않고, 온 마게도냐의 모든 형제에게까지 미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그들의 모습을 크게 칭찬하며, "더욱 그렇게 행하라"고 격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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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하나님께 배운 사랑 (θεο δίδακτοί) : 바울이 사용한 '하나님께 배운'이라는 단어는 매우 특별합니다. 이는 형제 사랑이 인간적인 노력이나 윤리 교육의 산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각 사람의 마음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의 결과임을 의미합니다.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는 능력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_환난 속의 사랑 : 바울이 형제 사랑을 강조하는 배경에는 교회가 처한 '환난'이라는 상황이 있습니다. 외부의 핍박과 압박은 공동체 내부의 결속을 시험합니다. 어려움이 닥치면 사람들은 이기적으로 변하고 서로를 불신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교회는 오히려 환난 속에서 서로를 더욱 뜨겁게 사랑함으로써 믿음의 공동체의 진정한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랑은 고난을 이겨내는 가장 강력한 영적 동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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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공동체의 사랑의 온도는 어떻습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이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저 벽에 걸린 표어에 불과합니까? 하나님께 배운 사랑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공동체 안에서 어려움을 겪는 지체를 돌아보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며, 함께 울고 함께 웃어주는 실천이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의 사랑이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 지역 사회와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로 확장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세상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알게 되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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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2절 성실 : 일상의 책임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적인 노동을 거룩한 소명으로 여기시며, 성실한 삶의 태도를 통해 세상 속에서 당신의 백성이 존경받게 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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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세 번째로,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명령합니다. 이 명령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집니다. 첫째는 '외인(外人)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즉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삶의 태도를 보이기 위함입니다. 둘째는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즉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책임감 있는 삶을 살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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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잘못된 종말론에 대한 경계 : 바울이 성실한 노동을 강조하는 이면에는, 임박한 종말에 대한 잘못된 열광주의로 인해 일상을 포기하고 나태하게 생활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우려가 깔려 있습니다. 4또한, 당시 헬라 철학자들 중에는 육체노동을 천시하며 유랑하며 말재주로 사람들에게 빌붙어 사는 이들이 있었는데, 일부 교인들이 이런 태도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바울은 참된 종말 신앙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오히려 '오늘'이라는 삶의 자리를 더욱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살아내는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_ 노동의 신학과 증거로서의 삶 : 바울은 노동을 단지 생계 수단으로 보지 않고, 기독교인의 중요한 '증거(witness)'의 장으로 여깁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의 신학적 논쟁이나 교리가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태도, 특히 정직하고 성실한 직업윤리를 통해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성실한 노동은 그 자체로 세상 속에서 빛을 발하는 선교적 행위입니다. 이는 노동을 신성한 소명으로 여겼던 종교개혁의 '직업 소명설'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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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터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의 직업 생활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룩한 소명의 장이 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단순히 돈을 버는 수단에 불과합니까?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정직하고, 성실하며, 탁월한 실력으로 맡은 바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게으름과 무책임함은 결코 신앙적인 태도가 될 수 없습니다. 신앙과 삶이 분리되지 않고,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예배가 될 때, 우리는 세상 속에서 진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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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거룩하시고 우리를 거룩함으로 부르시는 하나님 아버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당신의 자녀 삼으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길을 열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타락한 세상의 음란한 풍조 속에서 

우리 자신을 지켜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몸과 마음, 모든 관계가 주님의 다스림 아래 있게 하시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근심시키거나 저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옵소서.

하나님께 배운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기를 힘쓰게 하시고, 

우리의 사랑이 교회 울타리를 넘어 

세상 모든 사람에게로 흘러가게 하옵소서. 

또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상의 삶과 노동의 자리를 

거룩한 소명으로 여기며, 

성실함과 정직함으로 감당하여 

믿지 않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게 하옵소서. 

우리의 언행심사가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되기를 원하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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