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22-123편 순례자의 기쁨과 슬픔, 그 시선이 머무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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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의 여정은 계속됩니다. 거짓된 세상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회복한 순례자(시 120-121편)는 마침내 그 목적지인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시편 122편은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에 이르렀을 때의 벅찬 감격과 기쁨을 노래합니다. 그러나 순례의 길은 현실의 삶 속에서 계속됩니다. 시편 123편은 다시금 세상의 멸시와 조롱이라는 현실의 문제 앞에서, 순례자가 어디에 소망을 두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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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22편: 평화의 도시, 예배 공동체를 향한 기쁨과 기도>
시편 122편은 예루살렘 성에 도착한 순례자의 감격적인 노래입니다. 그는 눈앞에 펼쳐진 견고하고 아름다운 성읍의 모습을 보며 감탄할 뿐만 아니라, 그곳이 담고 있는 영적인 의미, 즉 예배와 연합, 공의의 중심지로서의 예루살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 공동체를 향한 축복과 평화의 기도로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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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1-5 예배와 정의의 중심, 예루살렘 ; 하나님은 흩어진 당신의 백성을 한곳에 모아 예배하게 하시며, 정의로운 통치를 통해 다스리시는 질서와 연합의 하나님이십니다.
순례자는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기뻤다고 고백하며, 마침내 예루살렘 성문에 들어선 감격을 노래합니다. 그는 '잘 짜인 성읍' 같은 예루살렘의 외적인 모습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함께 모여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고, 다윗의 왕좌를 통해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그 영적인 기능에 깊이 감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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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짜여진 성읍'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건축학적인 견고함을 넘어, 다양한 지파와 배경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하나의 정체성 안에서 강력하게 결속된 공동체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성벽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필수적인 방어 시설이었듯,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로 묶고 보호하는 구심점입니다. 이곳은 예배의 중심지("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이자 사법의 중심지("심판의 보좌")였습니다. 신정국가였던 이스라엘에게 예배와 정치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가 흘러나와야 했습니다. 이는 장차 오실 참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실 하나님 나라의 모형입니다. 새 예루살렘은 다양한 민족과 언어를 가진 수많은 성도들이 모여 어린 양 되신 그리스도를 찬양하며(계 7:9-10), 주님의 공의로운 통치를 받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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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이 모이는 교회는 이 땅의 예루살렘입니다. 교회는 단순히 예배만 드리는 곳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고 선포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과연 '잘 짜여진 성읍'처럼 다양한 지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답게 연합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예배는 삶 속에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습니까? 교회의 조직과 프로그램, 공간 활용 등 모든 것이 거룩한 예배와 공동체의 연합, 그리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목적에 부합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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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6-9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한 기도 ;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평화의 관계 속에서 번영하기를 원하시며,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기쁘게 들으시는 '샬롬'의 하나님이십니다.
예루살렘의 영광을 목격한 시인은 이제 그 도시를 위해 기도하자고 동료 순례자들을 초청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모든 자의 형통과 성 안의 평안, 궁중의 형통을 간구합니다. 이 기도는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한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한 복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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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이라는 이름 자체에 '평화의 터전'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예루살렘의 역사는 수많은 전쟁과 파괴로 점철되었습니다. 시인의 기도는 단순한 안녕을 비는 것을 넘어, 이름뿐인 평화가 아닌 하나님의 통치에서 비롯되는 참된 '샬롬'이 임하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 샬롬은 전쟁이 없는 상태를 넘어, 모든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고 정의와 번영이 넘치는 총체적인 안녕을 의미합니다. 시인은 개인의 복을 넘어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기도합니다. "너를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는 기복적인 약속이라기보다, 하나님의 공동체를 사랑하고 그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곧 자신에게도 복이 된다는 신앙 공동체적 세계관을 보여줍니다. 이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평화(요 14:27), 그리고 그가 십자가로 막힌 담을 허시고 이루신 화평(엡 2:14)을 통해 온전히 성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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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나 자신과 내 가족의 필요를 위해서는 간절히 기도하지만, 내가 속한 교회 공동체와 이 사회의 평화를 위해서는 얼마나 기도하고 있습니까? 시인처럼 우리 교회의 평화를 위해, 성도들 간의 하나 됨을 위해, 그리고 전쟁과 분열, 불의로 고통받는 이 땅의 샬롬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분단되고 분열된 조국의 하나됨과 남북의 평화 통일을 위해, 이념과 세대의 갈등이 치유되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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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23편: 멸시 속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믿음>
예루살렘에서의 영적인 감격과 기쁨도 잠시, 순례자는 다시 차가운 현실로 돌아옵니다. 시편 123편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때 마주하게 되는 세상의 멸시와 조롱 속에서, 오직 하늘에 계신 주님만을 바라보며 긍휼을 구하는 간절한 기도를 담고 있습니다.
# 123:1-4 주님,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 앉아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시며, 멸시받는 당신의 종들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기다리시는 긍휼의 주인이십니다.
시인은 자신과 공동체가 겪는 "심한 멸시" 속에서 눈을 들어 하늘에 계신 주를 바라봅니다. 그는 자신들의 시선이 마치 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남종과 여종의 눈처럼,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은혜 베풀어 주시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자신들의 영혼에 넘친다고 탄식하며, "은혜를 베푸시고 또 베푸소서"라고 반복하여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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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들어 주를 향하나이다'는 시편 121편의 고백과 연결되면서도, 그 의미가 심화됩니다. 121편이 순례길의 위험 속에서 '도움'을 구하는 시선이었다면, 123편은 인간관계 속에서 오는 모욕과 멸시라는 더 깊은 내면의 고통 속에서 '은혜(긍휼)'를 구하는 시선입니다. "종의 눈이 그의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비유는 당시 사회에서 종의 절대적인 의존 상태를 보여줍니다. 종은 주인의 손짓 하나에 생사여탈이 갈렸고, 모든 필요의 공급을 주인에게 의존했습니다. 이처럼 시인은 자신에게는 이 상황을 해결할 힘이 전혀 없으며, 오직 주인의 처분과 긍휼만을 바랄 뿐이라는 철저한 자기 부인과 전적인 의탁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안일한 자'와 '교만한 자'는 물질적 풍요와 세상적 성공에 취해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여기며, 하나님의 백성의 가난하고 겸손한 삶을 경멸하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멸시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깊은 영혼의 상처를 줍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들과 맞서 싸우거나 변명하지 않고, 오직 하늘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그분의 때를 기다립니다. 이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조롱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예표합니다(눅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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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의 가치관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이유로 오해받거나 무시당할 때가 있습니다. 정직하게 살면 손해 보는 것 같고, 겸손하게 섬기면 '만만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의 시선은 어디를 향합니까? 억울함에 분노하며 사람을 바라봅니까, 아니면 절망하며 땅을 바라봅니까? 시인처럼 우리의 눈을 들어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평가가 아닌 하나님의 인정이 중요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의 억울함을 아시고, 나의 눈물을 닦아주실 주님의 은혜를 잠잠히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에도, 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종의 심정으로, 잠잠히 주님의 때와 방법을 신뢰하며 기다리는 것이 참된 믿음의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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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절 우리 기도의 시작은 하늘에 계신 주님을 바라봄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심한 멸시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도밖에 없는 상황에서 시인은 눈을 들어 하늘에 계신 주님을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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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계시는 하늘, 우리와 차원이 다른 하늘, 그래서 모든 만물의 주재이신 하나님은 우리와 차원이 다른 영원하신 주님이십니다. 인생의 앉고 섬과 생사화복, 모든 나라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시는 분이시기에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일 뿐 아니라 우리 모든 삶의 여정 속에서 주님을 향하여 은혜를 구하는 것이 제대로 사는 길입니다. 외부적 위험 뿐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일들이 주님의 허락하심이 아니면 단 하루도 온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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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상황 속에서 하늘에 계신 주님을 향하여 은혜를 구해야 하는 것을 고백하고 실천할 때라야 온전한 성도, 하늘 백성, 주의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합당하고 성숙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주어진 믿음의 여정은 매순간 매일 매주 매월 매년 그리고 일평생의 모든 날들이 주님의 손에 달려 있기에 모든 날의 시작에 눈을 들어 주를 바라보며 기도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 우리 눈을 들어 하늘에 계신 주를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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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절 우리 기도의 자세는 철저한 자기 부인으로 주님께 온전히 의뢰하는 것입니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의 눈,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며 은혜 베풀어 주시길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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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눈은 소망을 바라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을 닮아 갑니다. 우리가 보는 것을 마음에 품게 되고, 품게 된 그것이 결국 우리의 언행으로 다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바라보느냐가 중요합니다.
더불어 지금 시인의 공동체는 함께 멸시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함께 눈을 들어 주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이 바라보는 모습을 상전과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남종과 여종의 눈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종으로 고백하며 주인의 절대적인 명령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처지에 있다는 고백입니다.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며, 자신의 뜻과 능력을 부인하고 철저하게 주인의 긍휼을 구하는 자세입니다. 그런 자기 부인의 고백은 결국 주의 은혜가 아니면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으며, 어떠한 출구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아기에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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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주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이들만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믿는 자만이 기도합니다. 역으로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아니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다른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 곧 하나님을 믿지 않는자는 결코 기도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하며 할 수 있다고 헛된 신념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물질과 힘과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자신의 운명이 달렸다고 생각하기에 결코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인의 공동체는 철저한 자기부인 속에서 하나님의 주 되심을 고백하면서 절대적인 순종을 전제로 눈을 들어 주를 바라며 은혜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이길 힘도 견딜 수 있는 능력도 이해할 수 있는 지혜도 인내할 수 있는 힘도 모두 주님이 은혜 베푸시면 가능하리라 믿기에 간구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때라야 주님을 전적으로 의뢰하고 주의 은혜로만 살 수 있음을 고백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방법과 때가 아닌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때와 방법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입니다. 믿음은 기도한 후 곧 모든 것을 주께 의뢰한 뒤에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보이지 않는 출구가, 바라는 일들이 마침내 주께서 그 뜻을 따라 이루실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지금 기도하고 계신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주의 은혜를 기다리십시오.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주님이 계신 곳 하늘에서 듣고 기억하고 응답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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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절 우리 기도의 내용은 멸시 속에서도 주의 은혜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은혜 베푸시기를 구하고 또 구하는 것은 시인의 공동체가 심한 멸시가 넘치는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입니다. 안일한 자의 조소, 교만한 자의 멸시가 넘치도록 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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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일한 자’와 ‘교만한 자’는 어떤 이들일까요? ‘안일한 자’들은 배부른 자들로 지금 가지고 있는 알량한 재산과 소유와 권력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소유의 주권과 생사화복의 주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고 사는 이들일 것입니다. ‘교만한 자’는 우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이며, 그러므로 인하여 자고하고 잔인하여 하나님을 믿지 않음과 동시에 사람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이용하거나 무시하고 모독하기를 서슴지 않으며, 자신보다 잘난 이 앞에서는 비굴하고, 모자란 이들 앞에서는 갑질하며 알량한 권력과 힘과 소유를 자랑하는 이들이라 할 것입니다.
이렇듯 시인의 공동체를 멸시하며 갑질하는 상황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죽을 만큼, 더이상 견딜 수 없을 만큼 차고 넘치고 있습니다. 멸시와 조소가 과하여 시인의 공동체가 무너질 절체절명의 상황이기에 이토록 눈을 들어 주의 은혜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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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주님의 뜻을 따라 거룩한 성도로 살아가는 여정에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일들, 때로 세상이 비웃고 조롱하며 멸시하는 상황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세계관과 전혀 다른 자기 비움과 희생과 사랑의 원리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들 속에서도 꿋꿋하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은 하늘에서 부으시는 위로와 치유와 구원의 은혜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시고 전파하고 증거하시는 여정 속에서,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를 지는 상황 속에서 지금 시인의 공동체가 당하는 넘치는 멸시와 조소를 당하셨습니다. 그러한 모든 잔을 마시기 위해 겟세마네에서 간절히 기도하며 아버지의 뜻을 구하고, 자기를 부인하며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쳐 복종시키며 결국 이겨내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을 우리도 따르려면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은혜에 호소하고 의지하셨 듯이, 우리도 그 은혜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할 때라야 이 신앙 여정을 거룩한 백성으로 온전히 감당해 나아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오늘도 부족하고 모자라고 궁핍한 상황일지라도 주께서 은혜로 부어주시는 그 힘으로 인내하고 견디고 이기고 살아가게 하실 줄 믿으며, 주님의 넘치는 은혜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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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관 찬송 및 찬양
찬송가 214장 (통 347) "나 주의 도움 받고자"
복음성가 "주만 바라볼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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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하늘 보좌에 앉으신 주님,
주님의 집에 올라가 예배하는 기쁨을 허락하시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통해 연합과 평화를 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주님의 공의와 사랑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그러나 주님, 우리가 세상 속에서
주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때 마주하는
멸시와 조롱으로 인해 우리의 영혼이 지칠 때가 많습니다.
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종의 눈과 같이,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주님의 은혜를 구하오니,
저희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세상의 교만한 시선에 낙심하지 않고,
묵묵히 주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르게 하시고,
마침내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주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오늘의 순례길을 믿음으로 완주하게 하옵소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오늘도 우리 주님을 바라보며 간구할 수 있는
믿음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허락과 명령을 따라 사는
주님의 종이오니 주의 뜻과 인도를 구합니다.
오늘을 살아갈 힘과 지혜와 능력을 부어주시옵소서.
부요한 자들과 교만한 이들의 득세와 멸시속에서도
결코 그들을 부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생사화복의 주권이 주께 있음을 믿는 믿음으로
자족하며 감사하며 즐거이 이 하루를 살게 하옵소서.
주님이 가신 그 길을 결단하고 가야 할 순간 순간을
주님이 주신 힘과, 주님이 허락하심 만이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음을 믿으며
오늘 하루의 삶의 승패가 우리 주님의 손에 있음을 또한 믿으며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합니다.
더불어 이미 우리 가운데 우리 주님의 그 은혜가 충만하게 부어진 줄 믿으며
오늘도 그 은혜 가운데 믿음으로 살기 원합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멸시를 참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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