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3:01-10 긴장 - 교회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의 투쟁 : 거짓 그리스도와 참된 성도: 짐승의 권세와 교회의 인내

by 평화의길벗 posted Jul 1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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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3:01-10 긴장 - 교회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의 투쟁 : 거짓 그리스도와 참된 성도: 짐승의 권세와 교회의 인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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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에서 하늘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땅으로 쫓겨난 용(사탄)은, 이제 분노에 가득 차 교회를 대적하기 위해 바다 모래 위에 섭니다. 13장은 그 용이 자신의 대리인이자 조력자인 두 짐승을 불러내는 장면으로 시작되며, 오늘은 그 첫 번째,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의 투쟁을 다룹니다. 이 짐승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정치권력을 상징하며, 교회를 핍박하고 자신에게 경배할 것을 강요합니다. 사탄은 마치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모방하여, 자신(용)과 바다 짐승(적그리스도), 그리고 땅의 짐승(거짓 선지자)으로 이루어진 ‘불경한 삼위일체’(unholy trinity)를 구축하여 세상을 미혹합니다. 이 끔찍한 짐승의 활동 앞에서, 성도들은 무엇을 붙들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는 것이 이 장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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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탄의 불경한 삼위일체

사탄은 하나님을 모방하여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처럼 자신도 사탄과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적그리스도)과 땅에서 올라온 짐승(거짓 선지자)을 내세워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자신을 경배하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면서 자신들에게 있는 능력과 보좌와 권세를 가지고 할 수 있는 한 많은 이들을 미혹하여 넘어지게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인을 치는 것처럼 사탄도 사람들에게 짐승의 수를 인칩니다. 이러한 일련의 이야기들을 1차적으로는 로마 지배하에 있는 정치 종교적 상황에서 이해하고 이어서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의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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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절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은 능력과 보좌와 권세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 용에게서 권세 받은 짐승: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적(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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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은 세속 권력(짐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교묘하게 모방하고, 기적처럼 보이는 사건으로 세상을 미혹하여 하나님께 돌아갈 경배를 가로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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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바다에서 한 짐승이 올라오는 것을 봅니다. 그 모습은 다니엘 7장의 네 짐승을 합쳐놓은 듯하며, 용(사탄)의 모습과 유사하게 열 뿔과 일곱 머리를 가졌습니다. 용은 이 짐승에게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줍니다. 짐승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치명적인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릅니다. 사람들은 그 짐승에게 권세를 준 용에게 경배하고, 또한 짐승에게 경배하며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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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정체와 권세의 출처 : 바다(이방 세계, 혼돈)에서 올라온 이 짐승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정치권력을 상징합니다. 1차적으로는 당시 교회를 박해하던 로마 제국을 가리키지만,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모든 적그리스도적 국가 권력을 포괄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짐승의 능력과 보좌와 권세가 스스로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용, 즉 사탄에게서 위임받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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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에 대한 사탄의 모방(Parody) : 이 짐승의 활동 방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교묘하게 모방하는 ‘패러디’ 혹은 ‘거짓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 치명적인 상처가 나음 : 이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사탄의 기만적인 모조품입니다. 당시 로마의 네로 황제가 죽은 후, 그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네로 재림 신화’가 퍼져 있었습니다. 요한은 바로 이 사건을 사용하여, 세상이 짐승의 ‘거짓 부활’을 보고 놀라며 그를 메시아처럼 추종하는 모습을 그립니다.

  •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 이 찬사는 본래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출 15:11)라고 불렀던,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할 찬양의 왜곡된 버전입니다. 세상은 짐승의 힘 앞에 굴복하여,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경배를 짐승에게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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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적인 싸움은 경배의 싸움 : 결국 용의 목표는 짐승을 통해 자신이 경배받는 것입니다. 이 영적 전쟁의 핵심은 군사적 충돌이 아니라, ‘누구를 경배할 것인가’를 둘러싼 경배의 싸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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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모습은 용의 모습과 유사하고, 이는 다니엘이 예고한 제국의 특징과 유사합니다(단 7:1-6). 이 짐승은 적그리스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당대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지위 곧 복음에 대한 이해를 로마의 황제를 염두해 두고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분의 능력과 권세와 구주 되심에 대해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황제의 아들이 팍스로마와 구원과 승리를 가져다 주게 될 것이라는 제국종교를 많은 이들이 숭배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 용이 준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로 많은 이들이 미혹되어 경배하고 추종합니다. 무엇보다 죽은 네로로 인해 제국에 혼란이 온 듯 하였으나 베스파시안(아들은 예루살렘을 함락한 디투스)이 등극하는 것을 통해서 죽은 줄 알았던 네로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건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이 짐승 곧 적그리스도를 따르고, 심지어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니 사람들이 급기야 용과 짐승에게 경배까지 합니다. 그러면서 감히 하나님께만 써야 할 표현들을 이러한 짐승에게 쓰면서 숭배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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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의 전략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강력하고, 매력적이며, 기적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수많은 ‘짐승들’(권력, 이념, 기술, 부 등)을 내세웁니다. 그것들은 마치 우리의 구원자가 될 것처럼 행세하며 우리의 경배를 요구합니다. 우리는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 권세의 출처가 어디인지, 그 영광이 누구에게로 향하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아닌, 세상의 힘과 ‘거짓 부활’을 내세우는 모든 것은 우상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짐승 앞에도 무릎 꿇기를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과 어린 양께만 합당한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늘에 속하지 않고 땅에 속한 자들도 예수님을 흉내내면서 능력을 행하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능력과 보좌와 권세가 대단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눈으로 보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속임수와 오해와 무지가 결국 네로가 죽고도 그의 아들로 부활했다고 믿음면서 그의 나라가 영원할 것이라 여기며 사탄을 따릅니다. 

지금도 사탄의 종노릇 하면서 우리 삶의 많은 분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정치, 경제, 종교 등등이 사탄의 하수인 노릇을 하면서 대단한 위세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은데 속으면 안됩니다. 이러한 것들을 분별할 수 있는 안목과 바른 기준과 무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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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절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은 한정된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 하늘을 향한 비방과 성도를 향한 전쟁

짐승은 하나님과 교회를 비방하며 성도들과 싸워 이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활동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 동안만 허락되며, 오직 창세 전부터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이 그 미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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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은 과장되고 신성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입을 받고,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습니다. 그는 입을 벌려 하나님과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합니다. 또한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고 모든 민족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습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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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두 가지 활동 : 짐승의 활동은 두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수직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비방이고, 둘째는 수평적으로 성도를 향한 전쟁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모독하고, 하늘에 속한 교회의 영광을 폄훼하며, 땅에 있는 교회를 물리적으로 핍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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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두 달과 싸워 이김 : 짐승은 ‘마흔두 달’이라는 한정된 기간 동안 성도들과 싸워 ‘이기도록’ 허락받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겪어야 할 고통스러운 현실입니다. 외적으로 볼 때, 교회는 세상 권력 앞에 패배하고 순교하며 무너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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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책에 기록된 이름 : 그러나 누가 짐승에게 경배하고 누가 끝까지 저항하는지를 가르는 최종적인 기준이 제시됩니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나 힘이 아니라,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었는가”의 여부입니다. 성도가 짐승의 미혹과 핍박을 이겨내고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는 궁극적인 근거는, 우리의 결단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하고 주권적인 선택(예정)에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이미 보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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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은 용으로부터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성도들과 싸워 이길 힘을 받았습니다. 또한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성도를 미혹합니다. 그러나 그 기한을 하나님은 마흔두 달로 한계를 정합니다. 더불어 열방 가운데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기록되지 못한 땅에 속한 자들은 그런 일로 미혹되어 짐승을 경배하기까지 합니다. 

초대교회 당시 많은 이들이 사탄의 지배와 권세 아래 목숨을 잃었습니다. 순교의 자리에서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에서는 미혹되거나 시험에 빠져서 하나님을 비방하고, 하나님 아닌 것들을 섬기면서도 하나님을 섬긴다 착각하면서, 짐승에게 경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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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 속에서 믿음 때문에 고난받고, 때로 패배하는 것처럼 보일 때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성경이 이미 예고한, 교회가 겪어야 할 현실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이 땅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우리의 이름에 있습니다. 이 영원한 부르심과 선택에 대한 확신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위협과 미혹을 이겨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며 위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이 아닌, 우리를 택하시고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서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도 사탄은 창세 이후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땅에 속한 사람들을 미혹하여 생명의 길이 아니라 사망의 길로 끌고가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더러 깨어 있으라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금새 우리도 모르게 이와 같은 실수를 범하여 망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것과 자녀됨과 사랑 받음을 늘 감사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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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0절 하나님의 백성들은 박해 속에서도 인내와 믿음으로 이기는 삶을 살수 있습니다. 

: 성도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나니

짐승의 핍박이라는 현실 앞에서, 성도들은 세상의 방식인 폭력으로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신뢰하며 끝까지 견디는 ‘인내’와 신실함을 지키는 ‘믿음’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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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라고 주의를 환기시킨 후,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고 말합니다. 9절은 예레미야에게 주신 말씀입니다(렘 15:2, 43:11). 사로 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다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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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예레미야의 예언(렘 15:2)을 배경으로 하며,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성도를 향한 교훈 : 첫째는, 핍박의 때에 성도들이 겪게 될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로잡혀 가도록 정하셨다면 사로잡혀 갈 것이고, 칼에 죽도록 정하셨다면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방식대로 칼을 들어 저항하지 말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맡기고 잠잠히 인내하며 믿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무기는 세상의 칼이 아닙니다.

박해자를 향한 경고: 둘째는, 박해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Lex Talionis, 동해보복법)에 대한 경고입니다. 성도들을 칼로 죽이는 자는 결국 자신도 칼로 망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들의 악행을 그대로 갚으실 것이니, 성도들은 복수를 자신의 손에 맡기지 말고 하나님의 공의를 신뢰하며 인내하고 믿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 두 해석은 결국 같은 결론에 이릅니다. 즉, 짐승이 다스리는 세상 속에서 성도가 취해야 할 자세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를 온전히 신뢰하며 끝까지 신실함을 잃지 않는 ‘인내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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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불의한 세상을 마주할 때, 분노하며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려 하거나, 혹은 절망하며 믿음을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제3의 길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인내와 믿음’의 길입니다. 단기적으로는 패배하는 것처럼 보이고, 답답하며 어리석어 보이는 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던 우리 주님을 따르는 길이며, 짐승의 권세를 이기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의 무기는 세상의 무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힘은 인내하며 믿음을 지킬 때,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광야의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요구되어지는 두 가지 지침은 인내와 믿음입니다. 끝날때까지 우리는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믿음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더불어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인내하고 믿음으로 견디는 것입니다. 마침내 주님이 약속대로 다시 오셔서 오래 참고 믿음을 지킨 이들을 향하여 상 주시는 이심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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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성도의 인내와 믿음을 기뻐하시며 

모든 능력과 보좌와 권세의 참된 주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악이 득세하고 과장되고 신성모독적인 말을 할 때에도

그것을 대적하지 않고 침묵하며 

수동적으로 살아왔던 모습들을 회개합니다. 

아무리 세상의 것들이 능력과 권세를 행한다 하더라도

주님이 세우지 아니 한 것들은 결코 오래 갈 수 없다는 것과

악한 세력들의 능력과 보좌와 권세는 

그 범위와 능력이 제한되어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가 패배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게 해주시고

생명책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된 줄로 믿으며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하시는 대로 기대하시는 대로

우리의 인내와 믿음을 유지할 수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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