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1:01-13 막간 - 말씀의 증인되는 교회 : 측량받고, 증언하고, 승리하는 교회

by 평화의길벗 posted Jul 1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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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1:01-13 막간 - 말씀의 증인되는 교회 : 측량받고, 증언하고, 승리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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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0장에서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 즉 하나님의 말씀을 먹은 교회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합니까? 11장은 그에 대한 대답입니다. 이 장은 여섯째 나팔과 일곱째 나팔 사이의 두 번째 막간(Interlude)으로서,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 ‘마흔두 달’로 상징되는 전 시대를 살아가는 교회의 정체성과 사명, 그리고 그 운명을 한 폭의 드라마처럼 보여줍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측량)를 받으며, 성령의 권능으로 세상에 말씀을 증언하고(두 증인), 마침내 주님께서 가셨던 그 길, 즉 고난과 죽음을 지나 부활과 승리의 영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핍박받는 교회를 향한 가장 확실한 위로이자, 우리의 사명이 무엇이며 우리의 마지막이 어떠할지를 보여주는 영광스러운 청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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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은 12-14장의 두루마리 계시의 축소판입니다. 본문의 구약 배경은 에스겔 3장(1-2절)이고, 4장과 다니엘 11장(3-13절)입니다. 더불어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예수님의 공생애 사건도 함께 배경으로 전제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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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절 하나님은 교회 곧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키고 보호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증인으로 살아갑니다. - 하나님의 성전 : 내면의 보호와 외면의 고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소유된 교회(성전)의 핵심적인 정체성과 영적 생명을 완벽하게 측량하여 보호하시지만, 동시에 교회가 세상 속에서 겪게 될 외적인 고난과 핍박을 허용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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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지팡이 같은 갈대를 받으며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는 명령을 듣습니다. 그러나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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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을 측량하라 : 구약에서 성전을 측량하는 행위(겔 40-42장, 슥 2장)는 하나님의 소유권을 확증하고, 파괴로부터 보호하며, 장차 회복될 것을 보증하는 행위입니다. 여기서 ‘성전과 제단과 경배하는 자들’은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성전이 된 교회 공동체와 그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의 영적인 본질, 즉 하나님과의 관계, 구원의 확신, 참된 예배와 같은 핵심적인 생명은 그 어떤 세력도 침범하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약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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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바깥마당을 내어주라 : 반면, 성전의 ‘바깥마당’은 측량에서 제외됩니다. 이곳은 세상과 직접 맞닿아 있는 교회의 외적인 영역을 상징합니다. 즉, 교회가 세상 속에서 겪는 물리적인 핍박, 사회적인 조롱, 재산의 손실, 심지어 육체적인 순교까지도 하나님께서 ‘마흔두 달’이라는 정해진 기간 동안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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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두 달 : 이 기간은 ‘한 때 두 때 반 때’, ‘천이백육십 일’과 동일한 기간으로,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 교회가 세상 속에서 증인으로 살아가는 전 시대를 상징합니다. 이 시대의 특징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내적 보호와 세상으로부터 오는 외적 고난이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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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고난을 만날 때,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것처럼 느끼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영적 시각을 제공합니다. 세상이 우리의 ‘바깥마당’(우리의 육신, 소유, 평판)을 짓밟을 수는 있어도, 우리의 영혼이라는 ‘성소’,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생명은 결코 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세상의 어떤 환난보다 안전합니다. 이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우리의 참된 정체성이 주님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음을 신뢰하며 인내할 수 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주님의 몸된 교회,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 전으로서의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이 친히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십니다. 비로 이 땅에서 환난을 당하기도 하고 심지어 외적으로 핍박을 당하기도 하고 죽기도 하지만 그 기간은 정해져 있고 한정되어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소유요 보호받는 교회로서 거룩한 성전으로서, 그리고 날마다 주님과 소통하고(기도), 또한 경배하는 자로 온전히 인내하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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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절 하나님은 교회(두 증인)에게 예언의 권세와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권세와 권능을 통해 증인으로 살아갑니다. -  두 증인 : 권세 있는 말씀의 선포

하나님께서는 고난받는 교회에게 성령의 권능을 부어주셔서, 세상의 불의에 맞서 회개를 촉구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권세 있는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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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로 묘사됩니다. 만일 누가 그들을 해하려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 원수를 삼켜버릴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엘리야처럼 하늘을 닫아 비를 막고, 모세처럼 물을 피로 변하게 하는 권능을 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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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증인 : 여기서 ‘둘’이라는 숫자는 구약의 율법에 따라 증언의 법적 효력과 신뢰성을 보증하는 수입니다(신 19:15). 즉, 교회의 증언은 사사로운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법적으로 유효하고 참된 증언임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또한 스가랴 4장의 환상을 배경으로 하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로 불리는데, 이는 교회가 세상의 빛(촛대)으로서, 인간의 힘이 아닌 오직 성령의 기름 부으심(감람나무)을 통해서만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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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 : 굵은 베옷은 회개를 상징합니다. 교회의 핵심적인 사명은 세상에 임할 심판을 경고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치는 회개의 복음을 선포(예언)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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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와 모세의 권능 : 교회가 행하는 권능은 구약의 가장 위대한 두 선지자를 떠올리게 합니다.

  • 입에서 나오는 불, 하늘을 닫는 권능 (엘리야) : 이는 하나님의 심판과 진리를 선포하는 교회의 ‘말씀’이 가진 권능을 상징합니다. 교회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불처럼 죄를 태우고 심판합니다.

  • 물을 피로 변하게 하는 권능 (모세) : 이는 애굽의 바로 왕, 즉 세상의 권력에 맞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출했던 모세처럼, 교회의 증언이 세상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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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세상의 핍박 앞에 무력하게 움츠러든 피해자 집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을 향해 담대히 말씀을 선포할 권세와 권능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여 복음을 전할 때, 그 말씀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고, 죄를 깨닫게 하며, 세상을 심판하는 능력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 예언자적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습니까?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에게 권능을 주신 주님을 의지하여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담대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동시에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성령이 함께하는 거룩한 교회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세상 가운데서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세상에 살아가는 교회에게 권능도 허락하십니다. 주님과 함께 왕노릇 하면서 심판의 메시지와 능력도 행할 수 있는 권세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다가오는 많은 위협에 굴복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상기하게 하고 돌이켜 회개하는 길만이 사는 길이라는 것을 증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 나의 삶은 증인된 사명에 얼마나 충성되는지 더불어 거룩한 백성의 삶을 온전히 지향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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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3절 하나님은 교회가 그리스도를 따라 고난과 함께 영광도 받게 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순교적 삶을 통해 증인으로 살아갑니다. - 그리스도의 길: 순교를 넘어 부활의 영광으로

교회의 사명은 필연적으로 세상과의 충돌과 순교적 고난을 동반하지만, 그 길은 패배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여, 마침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승리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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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을 끝낸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따릅니다. 곧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여 영광을 얻으시는 길입니다.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과 더불어 전쟁하며 교회를 이기고 죽입니다. 그 시신이 영적 소돔과 애굽의 길 곧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입니다. 그러나 백성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3일 반(한 때 두 때 반 때와 동일)동안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땅에 속한 자들은 이 두 증인이 자신들을 괴롭게 했다고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냅니다. 그러나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며 그들이 부활합니다. 이에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고 하늘에서 음성이 있어 올라오라 함을 듣고 교회는 구름(영광)을 타고 하늘로(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 올라가니 원수들도 구경합니다. 그 때에 큰 지진으로 많은 이들이 죽고 남은 자들은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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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은 교회의 운명이 정확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야기(고난-죽음-부활-승천)를 재현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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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조롱 : 교회가 끝까지 충성스럽게 증언을 마치면, 세상은 최후의 발악을 하며 교회를 핍박하고 죽입니다. 세상은 교회의 죽음을 보며 자신들의 승리라고 착각하고 기뻐하며 잔치를 벌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며 조롱하던 이들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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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과 승천(Vindication) : 그러나 하나님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세상의 축제가 한창일 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그분은 죽임 당한 자신의 증인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다시 살리시고,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영광스럽게 하늘로 올리십니다. 이것은 교회의 궁극적인 승리이며, 세상의 패배를 확증하는 하나님의 신적 ‘변호’(Vindication)입니다. 세상이 ‘죽이라’고 한 그들을 하나님은 ‘살리시고 높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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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과 회개 : 교회의 부활과 승천은 곧바로 세상을 향한 심판(지진)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모든 과정을 목격한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며 마침내 ‘하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것은 교회의 순교적인 증언과 하나님의 최종적인 승리가 헛되지 않고, 마침내 어떤 이들을 회개에 이르게 하는 구원의 능력이 됨을 보여주는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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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되는 일련의 사건들은 가깝게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건과도 연결되어 있고, 모세와 엘리야의 사역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짓 종교지도자들과 왕들과 땅에 속한 자들에 의해 골고다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사흘 반 동안 장사지내지 못하게 했다는 것은 죽은 자를 조롱하고 치욕을 주고 모멸감을 주는 행위입니다. 그렇게 교회도 세상의 조롱과 비난과 핍박과 모멸을 당할 수 있고 심지어 목숨까지도 잃을 수 있습니다. 열방 가운데 많은 이들이 그렇게 주님의 뒤를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 가신 길을 따라 비난과 채찍의 길을 따라 간 것입니다. 

두 선지자(엘리야와 모세) 곧 우리 주님과 교회가 땅에 사는 자들(불신자)을 괴롭게 한 고로(권능으로 회개의 복음을 전한 것들이 그들에게는 괴로움으로 인식된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과 교회의 죽음에 대해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서로 예물까지 보내며 자축합니다. 마치 자신들이 승리한 것처럼 말입니다. 세상은 자신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따라 살지 않고 역류하는 그리스도인들, 빛이 되고 소금 된 그리스도인들이 불편하고 불쾌하고 싫은 것입니다. 그러니 환대와 환영이 아니라 오히려 비난하고 핍박하고 거절하는 것이며 의인들의 삶을 비웃고 악인의 형통에 취해 여전히 자신들의 삶에서 돌이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삼일 반 후에 곧 때가 되면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니 그들이 발로 일어서서 부활하게 되고 구경하던 땅에 속한 자들은 크게 두려워합니다. 급기야 모세와 엘리야도, 그리고 주님도 또한 주님의 뒤를 따라 순교적 삶을 살아간 교회도 구름을 타고 곧 영광가운데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됩니다.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은 또 다른 세계로 간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늘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계신 곳이기에 모세도 엘리야도 예수님도 그리고 주님을 따라 순교적 삶을 살아간 교회도 그렇게 하나님의 품에 영광 가운데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 큰 지진이 나고 성 십분의 일(구약에서 남은 자)이 무너지고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합니다. 역설적이게도 남은 자의 수와 엘리야 시대에 바알과 우상에게 무릎꿇지 않았던 수, 칠천명의 사람들이 죽습니다. 이들의 죽음은 순교적 죽음의 길을 가며 증인의 삶을 살아간 교회의 여정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은 증인의 삶으로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주께 돌아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활의 영광은 예수님께서 첫 열매이시고 우리는 그렇게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완성된 최종적인 부활을 바라보고 이미 주님과 함께 죽고 다시 산 부활을 경험하며 믿고 기념하며 오늘 그 부활의 영광된 능력의 삶을 임마누엘 주님과 함께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은 기념만하고 기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에서 그 능력과 영광을 누리고 증거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고난과 핍박의 상황에서도 세상을 이길 힘과 인내의 능력의 원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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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누구든지 자신을 따라 오려거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 그 십자가의 길을 가셨고 그리고 삼일 만에 부활하사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두 증인된 교회도 그렇게 주님을 따르는 길에는 권능으로 세상을 심판하는 일도 있으나 순교적인 상황도 있습니다. 그래서 악이 이기는 것 같고 그렇게 교회가 조롱과 핍박에 스러질 때 세상은 오히려 자신들이 승리한 것이라고 착각하는 일도 있습니다. 교회가 그런 세상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인내해 가야 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때가 되면 이긴 자이신 주님은 순교자적으로 증인된 삶을 살아간 교회를 다시 부활하게 하셔서 교회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영광을 얻게 되어 주님과 함께 주님의 나라에 영원토록 함께 하게 될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교회의 순교적 삶에 많은 이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도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그 길이 좁은 길이지만 땅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가는 멸망의 길로 하지 않고 주님이 가신 길이기에 그리고 그 길 끝에는 우리 주님의 영광이 있기에 오늘도 우리는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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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교회를 보호하시며 권능과 권세를 주셔서

증인으로 살아가게 하시며 생기와 부활의 영광을 약속하신 하나님 아버지

환난과 핍박의 오랜 여정에서 때로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우리가 가야 할 좁은 길과 십자가의 길이 아니라

세상의 길을 부러워하고 주의 약속을 의심했던 죄를 고백합니다. 

우리가 가야 할 이 여정이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과

우리에게는 이미 세상을 이기신 주님이 우리 편이 되셔서

우리도 이긴자로 살아갈 수 있는 권능을 주셔서

주님이 친히 우리를 보호 하기도 하고 

우리도 또한 능력으로 이긴 자로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나 때로 악이 득세하며 교회를 핍박하고

그래서 순교적 삶을 살아야 하는 경우에도 

세상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주님은 우리에게 다시 살게 하시는 능력으로

영광을 얻게 하신 주님의 길로 행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하시며

세상을 이기셨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도 오늘 여기 우리가 선 자리에서 

부활을 살아 내고 누리며 증인의 삶을 살되

순교적 신앙의 여정으로 행하게 하옵소서. 

세상의 조롱과 핍박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런 세상을 긍휼히 여기며 기도하셨던 주님처럼

우리도 주님의 마음을 품고 긍휼의 마음으로 증인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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