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0:12-24 구원신탁 2 : 시온의 상처 치료와 회복의 약속

by 평화의길벗 posted Jul 0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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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30:12-24 구원신탁 2 : 시온의 상처 치료와 회복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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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행이 많고 죄가 허다한 유다에게 심판을 명하시지만 다시 상반된 태도로 치유하실 것에 대해 예언하십니다. 그렇게 가망 없는 유다를 고치시고 사랑하사 존귀하게 하시고, 특별히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실 것과 유다를 내 백성으로,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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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7절 하나님은 처음부터 징계 이후에 있을 치유까지 계획해 두신 분이십니다. 

야훼께서 의인화된 시온/예루살렘(2인칭 여성 단수)에게 말씀하고 계신 12-17절은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2-15절은 주전 587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한 (또는 임할?) 심판의 파국적 상황을 병의 비유를 통해 기술합니다(cf. 사 1:6; 호 5:12-13; 미 1:9). 치료가 불가능한 중한 병에 엄습(掩襲)당한 사람처럼, 그렇게 예루살렘과 유다는 하나님의 혹독한 징계의 심판에 떨어졌습니다. 예루살렘은 치료약이 없는 불치병에 걸렸습니다. 예루살렘의 징계는 물론 이들의 허물과 죄악 때문입니다(14bb절, 15ba절). 이어서 반전된 두 번째 단락은 두 개의 신탁으로 구성된 16-17절입니다. 시온의 치유와 원수들의 파멸을 약속한 말씀입니다. 야훼께서 불치병에 걸린 시온/예루살렘을 치료해 다시 건강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17절).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과 유다를 침략하여 약탈과 유배를 일삼았던 자들이 거꾸로 약탈과 유배를 당할 것입니다(16절).

12절 원래 탄식시에서는 개인이나 공동체가 당면한 역경을 묘사하며 하나님께 탄식하는데, 12-14a절에는 야훼께서 직접 심판으로 인한 시온의 참상을 기술하십니다. 마치 야훼께서 백성을 대신하여 탄식하시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상처’로 번역된 히브리어 ‘셰베르’(붕괴, 멸망)는 적에 의한 민족의 멸망을 가리키는데 주로 사용됩니다(cf. 4:6, 20; 6:1, 14, 8:11, 21; 48:3; 50:22; 나 3:19). 시온의 고칠 수 없는 상처는 이들의 죄악에 대한 그분 심판의 결과입니다(14b-15절). 시온의 부상은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치명적입니다.

13절 공정한 재판을 언급하는 13a절(cf. 5:28; 22:16)은 문맥 흐름에 상당히 이질적입니다. ‘네 송사를 처리할 재판관이 없고’ 라는 진술은 이중적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탄식 상황을 배경으로 보면, 시온은 자신을 변호해줄 사람조차 구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형편에 떨어집니다. 재판상황을 고려해서 보면, (의로우신) 야훼께서 (불의한) 시온을 치셨기 때문에 그를 위해 송사해 줄 자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치신 야훼를 재판정의 피고인석으로 불러낼 자는 없습니다. 시온의 참상이 야훼 심판의 결과이기에 시온의 사정을 변호해줄 자는 없습니다. 야훼에 의해 시온에 내려진 파국적 심판의 판결은 취소되거나 경감될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13a절과 13b절은 일치할 수 있습니다. 시온의 재판은 이미 판결이 내려져 끝이 났기에 판결의 집행과 그 결과만 남아있을 뿐, 재심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판결의 집행으로 시온은 치명적 상처를 입었습니다. 상처를 아물게 해서 새 살을 돋게 할 수 있는 치료약(변호자)은 없습니다.

14절 네 애인들은 모두 너를 잊고 너를 찾지 않는다. 너의 허물이 크고 너의 죄악이 많기에 원수가 치는 것처럼 내가 너를 쳤으며, 잔혹한 자가 징계하는 것처럼 [내가 너를 징계하였기 때문이다]. 

유다의 ‘사랑하던 자’(애인들)는 종교적 우상보다는 유다의 정치적 동맹자들(→ 22:20,22; cf. 겔 16:33; 호 5:13; 12:1), 특히 애굽을 가리킵니다. 애굽의 지원을 기대하며 (또는 애굽의 부추김을 받아) 주변의 나라들과 연대해서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주전 589년에 바벨론에 반역을 꾀합니다. 느부갓네살은 자신을 배반한 유다를 징계하기 위해 원정을 떠나 예루살렘을 포위합니다. 고립무원에 처한 예루살렘을 돕기 위해 주전 588년에 애굽의 군대가 개입하기는 하지만 바벨론 군대의 반격에 곧 퇴각합니다(cf. 37:5).

14b-15절은 징계의 원인을 언급합니다. ‘네 악행이 많고 네 죄가 많기 때문에’ 시온은 야훼로부터 원수처럼 징계를 당합니다. ‘무사르’는 개선을 위한 징계를 함축하지만 여기서는, 바로 앞의 병행구와 주어로 사용된 ‘잔혹한 자’가 보여주듯이, 단순히 ‘잘못에 대한 벌’을 말할 뿐입니다.

15절 어찌하여 너는 네 상처에 대해 네 고통이 치료받지 못했다고 부르짖느냐? 너의 허물이 크고 너의 죄악이 많기 때문에 내가 이 일을 너에게 행하였다.

자신의 상처를 치료해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시온에게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너는 … 치료받지 못했다고 부르짖느냐?” 하고 책망하십니다. ‘현재의 상처’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시온에게 그분은 그 상처의 원인을 살펴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상처의 치료는 그 원인을 정확히 규명하는 데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상처를 치료해주지 않으신다고 부르짖기 전에, 시온은 먼저 그 상처가 자신의 허물과 죄악에 대한 그분의 징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억압당하는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시는 분이지만(cf. 시 107:13, 19), 모든 부르짖음에 항상 긍정적으로 응답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분은 사회적-정치적 권리와 보호를 부당하게 박탈당한 약자들인 과부와 고아와 객의 호소에 각별히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으로 [받아야 할] 고난을 당하는 경우라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시온은 자신의 상처가 치료받지 못했다고 하나님께 부르짖을 권리나 자격이 없습니다. 시온은 먼저 상처의 원인을 살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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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회복의 약속)

16절 겉보기에 16-17절은 시온의 불만(15절)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적 답변처럼 보이지만, 15절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맞는다면 달리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5절에서 시온의 불만 어린 부르짖음을 거절하시며 시온의 상처를 치료하지 않는 당신의 정당성을 주장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치료의 요청을 거절하시는 것이 아니라, 시온의 불만의 부당성을 고발하십니다. 시온의 상처와 고통은 하나님의 정의의 실현이기에 시온은 상처의 치료를 요청할 수 없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16-17절의 갑작스런 회복의 약속은 예루살렘과 유다의 구원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총과 주권에 기인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서 시온의 절망적 현실에 무조건적으로 개입하셔서 이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연히 받아야 할 심판에 떨어져 고난을 당하는 예루살렘과 유다에게 여전히 자애로우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치료를 요구할 자격이 없는 시온에게 원수들의 멸망(16절)과 상처의 치료(17절)를 약속하십니다. 시온의 원수들을 불러 시온을 징계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시온을 친 자들을 마찬가지로 징계하실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유다가 멸망 당하고 사로잡혀 간 것처럼 이들을 친 자들이 멸망 당하고 사로잡혀 갈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유다를 약탈하였던 자들이 약탈을 당할 것이다(jus talionis). 원수들의 멸망은 당한 자의 증오심의 표출이 아니라 예루살렘과 유다의 정치적 회복을 의미합니다.

17절 내가 너에게 건강을 가져다 주고 너의 상처를 낫게 해 줄 것이다. 야훼의 말씀. 사람들이 너를 ‘버림받은 여자, 아무도 찾지 않는 시온’ 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야훼께서 시온의 적들을 멸망시키실 뿐만 아니라(16절) 치료가 불가능한 중병에 걸린 시온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시온은 죄로부터 완전히 용서를 받습니다. 시온을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주어 멸시 당하게 하셨던 하나님께서 이들로부터 시온을 다시 구해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시온을 치기는 하셨지만 완전히 버리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 시온의 [불만 어린 탄식이 아니라] 상처와 고통에 응답하십니다. 이방인들의 조롱은 탄식시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로(cf. 렘 18:19; 시 35:24-26), 기도자는 하나님의 개입을 기대하며 자신의 조롱 받는 현실을 그분께 하소연삽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인용하시며 구원의 동기로 사용하십니다. 이방인들의 눈에 시온은 자신의 하나님 야훼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하고 ‘버림받은 여자’입니다. 시온은 폐허가 되어 들짐승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의 조롱거리가 된 시온의 가엾은 처지가, 어디에서도 위로와 도움을 찾을 수 없는 시온의 비참한 운명이 야훼를 움직여 그분 마음을 되돌리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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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22절 하나님은 포로로 끌려간 유다 백성을 본토로 돌아오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거처에 사랑을 베푸시고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앞 단락들에서 포괄적으로 선포된 구원약속(3절[운명을 되돌림], 8-9절[멍에를 부수어줌], 10-11절[귀환], 16-17절[회복])이 18-21(22)절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언급됩니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과 유다의 성읍들이 다시 재건되어 예전 모습을 되찾을 것입니다(18절). 주민들은 많아지고 예전의 영화가 회복되고 더 이상 멸시당하지 않고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가운데 살 것입니다(19절). 예루살렘과 유다를 괴롭히는 자들을 야훼께서 직접 징계하실 것입니다(20절).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이방인의 지배를 받지 않고 ‘야훼께서 당신에게로 가까이 오게 한 통치자’에 의해서 다스려 질 것입니다(21절). 이스라엘의 위반으로 파괴된 처음의 계약관계가 다시 회복될 것입니다(22절).

18절 “이렇게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야곱의 천막들의 운명을 되돌리고 그의 거처를 가엾이 여길 것이다. 성읍이 [폐허가 된] 언덕 위에 [다시] 건축되며 궁궐이 제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을 심판하셨던 야훼께서 이제 ‘야곱의 천막들의 운명’(‘야곱 장막의 포로들’)을 되돌리십니다(→ 3절). 그분의 가엾이 여기시는 마음, 곧 모성적 사랑이 운명의 전환을 가능하게 만듭니다(cf. 사 30:18; 49:10-15; 54:8-10). 어머니가 자신의 자궁에서 나온 자녀들에게 베푸는 그러한 사랑으로 야훼께서 애굽에서 불러낸 아들 이스라엘(cf. 호 11:1)에게 구원을 베푸실 것입니다. 이방민족들의 침략으로 파괴되어 폐허로 남은 성읍들이 재건되고 예루살렘에는 허물어진 궁궐이 옛 모습을 되찾습니다. [성전의 재건에 관한 언급이 없음을 주목할만 하다.]

‘야곱 장막’은 장막(천막)에 사는 야곱의 후손들을 가리킨다(cf. 민 24:5[“야곱이여 네 장막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쳐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이 표현은 아마도 의도적으로 선택된 것 같습니다. ‘장막’은 한편으로는 폐허가 된 성읍들이나 벌판에서 살아가는 현재의 궁핍함을(심판), 다른 한편으로 ‘야곱 장막’은 이스라엘이 야훼와 함께 하였던 예전의 광야시대를 함축할 수 있습니다.

19절 전반절은 환유(metonymy)를 사용하여 정상적이며 축복이 넘치는 삶을 기술합니다. 모든 즐거움과 기쁨을 빼앗겼던 예루살렘이 감사와 기쁨을 되찾습니다. 사람들은 야훼의 역사적 구원과 땅의 축복을 감사하며 그분께 감사예배를 드립니다. 예루살렘에는 기쁨의 잔치, 특히 혼인 잔치가 끊이지 않습니다(cf. 7:34; 16:8-9[잔칫집 출입의 금지]; 25:10). 전쟁과 땅의 피폐(疲弊)로 인해 주민수가 격감해진 유다와 예루살렘에 다시 거주민들이 증가합니다(19ba절: cf. 23:3; 29:6; 창 1:28; 9:1, 7; 레 26:9; 37:26). 멸망 당해 초라해진 이스라엘이 정치적 실체로 새로이 출발하기 위해 인구의 증가는 필수적입니다(cf. 사 44:26이하; 겔 36:33-36). 야훼께서 주민들을 아주 많게 해주시고, 이들이 더 이상 주변 나라들로부터 멸시를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양적으로 회복시켜 영화롭게 해주십니다. 인구의 절반가량의 사람들이 죽었기에 인구가 감소되어 전망이 밝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 때에 바벨론 유배민이 큰 역할을 한 것입니다. 외적 환경이 좀 더 나았기에 많은 이들이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겠고, 정치 종교 경제적으로 뛰어난 이들이 와서 후에 예루살렘 제건 가능해집니다.

20절 야곱의 자손들이 옛날처럼 많아지고(cf. 출 1:7, 9, 10) 하나님과의 이상적인 관계가 회복될 것입니다(20a절). 야훼께서 족장들에게 주신 자손의 번성에 관한 약속이 갱신됩니다. ‘예전과 같겠고’는 일차적으로는 심판 이전시대의 회복을 가리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약속에 의존할 것을 권고하는 말씀으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족장들, 특히 아브라함이 불가능한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자손을 얻은 것처럼, 실존을 위협받고 있는 왜소해진 현재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에 의존할 때 옛날처럼 그 수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증가할 것을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새로운 구원 공동체는 야훼 ‘앞에 굳게 설’ 것입니다(20ab절). 야훼의 모성적 사랑으로 회복된 야곱의 회중은 그분께 감사찬양을 드리며 그분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굳건해집니다. 더 이상 그분을 배반하고 떠나지 않습니다. 야훼께서 당신 앞에 온전히 서 있는 이스라엘을 번성케 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외부의 위협 없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주십니다. 야훼께서 당신 백성을 억압하는 자들을 벌하십니다(20b절).

21절 “그의 지배자가 그[들]에게서, 그의 통치자가 그[들] 가운데서 나올 것이다. 내가 그를 가까이 오게 하여 그가 내게로 나아올 것이다. 나에게 나아오려고 자기 마음을 저당잡힐 자가 누가 있겠는가? 야훼의 말씀.”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이방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나옵니다(cf. 신 17:15). 의도적으로 세습적-제도적 성질을 갖는 ‘왕’이란 칭호를 사용하지 않고 ‘영도자’(ryda, 아디르; 개역성서는 이를 ‘왕’으로 잘못 번역한다)와 ‘통치자’를 사용합니다(cf. 미 5:1). 또 통치자를 다윗 집안과 관련시키지도 않습니다. 본문은 이 통치자와 야훼 사이의 개인적 관계에 초점을 맞춥니다. “내가 그를 가까이 오게 하리니 그가 내게 가까이 오리라”(21ab절). 야훼 앞으로 나아올 수 있는 특권은 레위인이나 제사장에만 허락되기에(cf. 출 19:22; 20:21; 24:2; 민 16:5, 10) 이 통치자에게 제사장적-중보적 기능이 주어지고 있음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나올 새로운 통치자는 모세와 아론처럼 구원을 중재하는 제사장적 인물입니다.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목숨을 담보해야 할 정도로 위험스런 일로(cf. 출 3:5; 19:9-25), 하나님의 허락에 의해서만 가능할 뿐이다. 어떤 통치자도 – 정치적이건 또는 제사장적이건 간에 –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권리를 통치권의 일부로 주장할 수 없습니다. 제사장적-중보적 기능이 주어진 통치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 앞에 나아올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하십니다. 새로운 통치자에 의한 구원시대가 철저하게 그분의 은총에 의존적임을 보여줍니다.

22절 야훼께서 이스라엘의 구원과 생존을 위해 주도적으로 역사에 개입하십니다. 그분은 계약의 양식을 통해 지속적인 구원을 약속하십니다(cf. 24:7; 출 6:7; 레 26:12; 신 4:20; 7:6; 26:18; 29:12; 왕하 11:17; 겔 11:20). 파괴되었던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관계가 처음처럼 다시 회복됩니다. 이스라엘은 그분의 백성이 되고, 그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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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24절 하나님은 마음에 뜻한 바를 이루기까지 유다를 향한 진노를 돌이키지 않겠다고 합니다. 

30:23-24와 23:19-20은 거의 문자적으로 일치합니다. 동일한 내용이 한 번은 심판을 선포하는 문맥에서, 한 번은 구원을 선포하는 문맥에 나옵니다. 이 단락은 어느 것이 원래적인지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집니다. 

a) 30:23-24이 23:19-20의 말씀을 다시 반복한 것이라면, 이 경우 23-24절은 구원(18-22절)이 심판 다음에 오는 것을 다시금 강조하기 위해 현재의 위치에 놓여집니다. 예레미야도 구원을 선포했지만 그는 예루살렘의 심판을 부정하며 오직 구원을 선포한 하나냐와 같은 예언자들과는 근본적 차이가 있습니다. 예레미야에게 있어 구원은 심판의 우회나 취소가 아니라 심판 이후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편집자는 구원을 선포하는 거짓 예언자들에 맞서 심판의 필연성을 주장한 23:19-20을 인용하여 구원신탁 다음에 위치시킵니다.

b) 30:23-24가 원래적인 말씀으로 나중에 23:19-20에 다시 인용되었습니다. 30:23-24절이 원래적이라면 또는 현재의 문맥에서 보자면, 이스라엘의 회복(18-22절) 다음에 야훼의 진노가 ‘악인의 머리 위에’ 휘몰아치기에, 이때 악인들은 전체 이스라엘 또는 예언자들이 아니라, 회복된 공동체 안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악인들은 야훼의 구원 공동체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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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원래 악행이 많고 죄가 허다한 죄인입니다 

그렇게 자격 없는 우리를 고치시고

자격 없는 인생을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인과 공동체가 무너져 가는 오늘날에도

성령님의 함께하심과 치유하심과 회복을 간구하오니

또 특별히 역사하실 날을 고대해 봅니다. 

우리의 왕되신 주님의 통치에 순응하며

주님의 뜻대로 순종케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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