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03:01-26 有得安逸, 有得平静, 也有得安息, 却不患难来到

by 평화의길벗 posted Nov 06,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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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03:01-26 有得安逸, 有得平静, 也有得安息, 却不患难来到

*

이해할 수도 없고, 감당하기도 힘든, 까닭모를 고난이 지속되는 가운데 욥의 독백이 나옵니다.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고, 차라리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기고, 평온도 안일도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 있다고 합니다.

*

# 1-10절 한 사람의 탄생은 놀라운 신비를 갖고 있습니다. 

고통의 시간이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모르지만 마침내 욥은 독백처럼 아픔을 쏟아냅니다. 친구들도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도 들으셨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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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 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

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였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더라면, 

흑암이 그 날을 덮었더라면,

그 밤이 캄캄한 어둠에 잡혔더라면, 

해의 날 수와 달의 수에 들지 않았더라면,

그 밤에 자식을 배지 못하였더라면, 

그 밤에 즐거운 소리가 나지 않았더라면,

날을 저주하는 자들 곧 리워야단을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들이 그 밤을 저주하였더라면,

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지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여 내 눈으로 환난을 보게 하였음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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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고통이 견딜 수 없기에 차라리 자신의 존재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겠다고 고백하는 욥의 독백을 통해 역설적으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는 일의 놀라운 신비를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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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난 날이 부활했기에,

아이를 밴 날이 있었기에,

그 날이 밝았기에,

하나님께서 위에서 돌보셨기에,

빛이 그 날을 비췄기에,

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 것이라 하지 않았기에,

구름이 그 위에 걷혔기에

흑암이 그 날에 열렸기에

그 밤이 환한 밝음에 풀렸기에,

해의 날 수와 달의 수에 들었기에,

그 밤에 자식을 배었기에,

그 밤에 즐거운 소리가 났었기에,

날을 축복하는 이들이 그 밤을 축복했기에,

그 밤에 새 별들이 밝아졌기에, 

그 밤이 광을 바랄 때 얻어 동틈을 보았기에

하나님 보시니 참 좋았더라

그래서 모태의 문을 열어 내 눈으로 환희를 보게 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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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을 저주 할만큼 고통이 큰 날이 있지만, 그 날을 축복하며 기뻐할 날도 있습니다. 개인에게 그리고 공동체에 그런 날이 혼재하고, 역사에는 그런 날들의 반복이 지속됩니다. 기쁨의 날들보다 저주할만한 고통의 날들이 훨씬 더 많지만 우리는 짧은 그 기쁨이 저주할만한 많은 날들을 까맣게 잊을 만큼 능히 이기고도 남음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어미가 아이가 주는 기쁨을 통해서 산고를 잊고 다시 새 생명을 잉태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부디 오늘 우리 삶에도 여전히 생일을 저주할만큼 고통스런 일들이 혼재해 있더라도,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시며, 이후로도 함께하사 예비하실 주님으로 말미암아 고통도 슬픔도 아픔도 절망도 능히 감내하고 이겨낼 수 있는 그런 기쁨과 환희의 날이 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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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9절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과 함께한 나라의 쉼과 평안을 갈망합니다. 

어찌하여 태어날 때 사산아(死産兒)가 되지 않아나 하면서 탄식합니다. 어머니가 해산의 수고를 통해 낳고 젖을 빨렸기에 살았는데, 그래서 지금 살아있는 자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차라리 죽었다면 더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토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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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자기를 위하여 폐허를 일으킨 세상 임금들과 모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을 채운 고관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또는 낙태되어 땅에 묻힌 아이처럼 나는 존재하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을 것이라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피곤한 자가 쉼을 얻으며

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호통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거기서는 작은 자와 큰 자가 함께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

.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를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은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은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우에 춤추는 자로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은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네가 알겠느냐
세상의 것은 너의게 허무니
너 죽은 후에 모두 다 없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은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_윤심덕 <死의 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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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너무 고통스러우면 차라리 죽음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찌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나으랴! 그만큼 고통이 너무도 커서 차라리 죽음에 대해서 동경하게 됩니다. 그런데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기대는 역설적으로 주님이 우리에게 이미 임한 하나님나라와 완성된 하나님나라의 이상과도 같은 표현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주와 동행하며 함께할 때에 평안과 쉼을 주셨고, 왕같은 제사장으로 불러 주셨으며, 모든 것을 허락하시되 청지기로 살게 하셨고, 새 사람 새 피조물 새 백성으로 존재하게 되었으며, 빛을 보고 살게 되었고, 혼돈이 그치고 참된 쉼을 얻으며, 속박에서 해방의 기쁨을 얻고, 억압하는 이들의 호통을 듣지 않아도 되고, 신분의 고저와 소유의 많고 적음이 없이 평등한 나라를 살게 하셨습니다. 

고통을 바라보면 보이지 않고, 고통속에서도 느껴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계산으로 도무지 이와 같은 실현된 종말이 나와는 무관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다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라야만 이 절망적 고통과 죽음의 문턱에서도 우리게 베푸신 쉼과 주로 말미암은 생수로 해갈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더불어 그런 고난과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을 향하여 이 소망을 나눌 수 있길 기도합니다. 

*

# 20-26절 지금 내게 주신 빛과 생명과 평온과 안일과 휴식을 잘 누리고 있나요?

죽음을 갈망하는 욥에게 하나님은 빛과 생명을 주어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당하게 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평온도, 안일도, 휴식도 없이 불안만 가득한 처지에 대해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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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나님께서 고난당하는 자에게 차라리 죽음을 주시지 않고, 빛과 생명을 주셔서 살게 하시는지 욥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었던 하나님과 다른 낯선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우리는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은 더더욱 우리가 어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내가 안다 한들 그 앎은 수천년 역사와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앞에서 그저 티끌만큼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안다고 확신하는 일일수록 어쩌면 더 오류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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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불행의 원인 말고 불행의 결과가 결국 불안 곧 죽음과 고통과 절망으로 인한 불안인듯 싶습니다. 그것이 커질수록 우리 안에 평온도 안일도 쉼도 자리할 수 없습니다. 병상에서, 전장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고통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그 시간들은 불안으로 점철되어 캄캄한 어둠을 지나는 것처럼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생각할 그 날들이라고 생각될 것입니다. 

지금 내게 없더라도 우리 곁에는 그런 긴긴 터널을 지나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도 그런 날들이 일평생 없을 수는 없습니다. 삶은 불안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평온도 안일도 쉼도 분명 있습니다. 불안한 때에도 그리고 평온한 때에도 우리가 여전히 주님 앞에 있다는 사실로 그분께 토로하고, 그런 이들의 곁에서는 위로자가 되고, 그렇게 사랑받고 경험하고 누린만큼 변함없이 묵묵하게 곁을 지켜주는 그런 사람이고 싶습니다. 

*
# 거둠의 기도

우리에게 이 땅에서 살아갈

생명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 아버지

그 놀라운 기적과 환희를 허락하셨기에

오늘 여기 우리가 살아 있음을 감사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질고와 염려과 근심들

그리고 질병과 사고의 고통으로 아파하는 이들

가까운 이웃과 사랑하는 이들을 잃고서

상실과 절망으로 아파하는 이들

그런 나와 우리의 곁에서

함께하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길 바라옵고

위로부터 오는 평온과 안일과 쉼을

소망가운데 바라보고 누리게 하옵소서.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도

주님이 약속하신 여기에서 지금 누릴 것을

시의적절할 때에 만나고 누리고 살게 하옵소서. 

이미 이루신 하나님나라를

오늘도 순종으로 살고 누리게 하옵시며, 

주님이 주신 빛과 생명을 통하여

살아갈 이유를 더 분명히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아는 앎의 한계를 인정하고

날마다 낯선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있어서도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은혜임을 기억하고

믿음과 삶에 대한 더 깊고 넓은 지혜를 얻어

어떤 삶의 정황 속에서라도

의연하게 감당해 갈 수 있는 

믿음 얻게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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