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02:13-25 왕권에 대한 반역은 파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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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을 꾀하다 솔로몬으로부터 자비를 입고 집에서 살던 아도니야는 다시금 왕위에 대한 탐욕으로 밧세바에게 접근하여 왕권에 도전하다가(아비삭을 취하는 일은 결국 왕권을 취하기 위한 노림수) 솔로몬이 보낸 브나야에 의해 죽음을 맞당하게 됩니다(본 단락은 다윗의 유언을 따라 순종하는 이야기인 동시에 솔로몬의 왕권에 도전하는 위협들을 제거하므로 왕권이 강화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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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18절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무리수를 낳습니다.
아도니야는 밧세바에게 접근하여 원래 왕권이 자신의 것이었지만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왕권을 주셨다고 말하면서도, 다윗의 여인(첩)이었던 수넴 여자 아비삭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도록 솔로몬에게 말해 달라고 청탁합니다. 이에 밧세바는 아도니야를 위해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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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니야는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에 접근하여서 자신의 생각을 전합니다. 그것은 이전에 왕이 되려던 자신의 시도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실패한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주권을 인정한 듯 하지만 아직까지 아쉬워하고 부득이하게 양보한 것같은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었으니 이제 자신이 원하는 청을 들어달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다윗의 건강을 위해 들였던 수넴여인 아비삭을 아내로 맞이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얼핏 아비삭의 미모에 반해 결혼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지만 당시의 문화에서 선왕(先王)의 여인들을 취하는 것은 그 권한과 왕위를 취하는 것과 같은 행위이기에 은근한 협박과 심각한 도전 곧 반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밧세바의 반응이 의외로 수용적입니다. 아도니야가 밧세바를 찾아간 것은 현재 솔로몬에게 가장 영향력을 행사할 이가 밧세바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다고 밧세바가 어리숙한 여인이었다고 보기 힘듭니다. 그렇다면 왜 아도니야의 행동이 왕권에 대한 반역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런 청탁을 수용하는 것처럼 행동했느냐는 것입니다. 22절 이후에서는 솔로몬이 어머니에게 역정을 내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나단이 밧세바를 찾은 이야기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밧세바가 이렇게 행동한 데는 깊은 저의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다윗의 세 여자가 등장합니다. 아도니야의 어머니 학깃,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 그리고 다윗의 노년에 시종들이 기력 회복을 위해 들인 수넴 여인 아비삭까지 세 사람입니다. 한 남편을 두고 여러 여자들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출생 순서를 따라서 왕권 상속이 결정되는 상황이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왕이 될 아들의 어머니들은 자신의 아들이 왕이 되게 하는 일에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밧세바의 이러한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에는 정적들을 제거하려는 치밀한 계산이 있었지 않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학깃의 세력을 제거하고, 비록 자녀는 없지만 다윗의 노년에 얻은 젊은 아비삭을 한꺼번에 정리할 수 있는 계략을 생각하고 한 행동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밧세바는 아들 솔로몬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러한 행동을 통해서 솔로몬이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 정적들을 제거하는 명분을 세워 주고 왕권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결국 아도니야는 밧세바를 이용하려 했지만 역으로 밧세바는 그런 아도니야의 반란을 이용해서 솔로몬의 정적들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삼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이러한 견해는 솔로몬이 밧세바에 대한 예우와 청탁을 제안하는 부분에 분노하긴 하지만 그에 대한 처벌을 하지 않고 있기에 소기의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도니야를 볼 때는 그가 한번 자비를 얻고도 왕권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여 어리석은 행동을 하므로 스스로 자멸하는 길을 택했고, 밧세바는 솔로몬의 왕권 강화를 위해서 이러한 정적들을 제거하는데 반역하는 이의 술수를 오히려 역이용하는 지혜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여호와께서 세우신 집은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온전히 믿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탐욕의 노예가 되어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했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이용하여 죄인은 심판하고 언약은 성취해 가시는 역설적인 섭리를 꿋꿋하게 진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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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다고 우리가 악에 거할 수는 없습니다. 더욱 주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탐욕의 노예가 되어 우리의 언행심사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하신 인도에 한걸음 한걸음 순종하는 길로 나아가 선한 일의 도구로 쓰임받길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마음에 호리라도 하나님의 허락하심에 머물지 않고 욕심을 내며 다른 저의를 품는다면 결국 술수와 기만적 행위들을 합리화하면서 행할 위험이 있습니다. 영적 분별력과 시대를 분별하는 통찰, 그리고 상황에 대한 판단력과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할 줄 아는 안목들 의외의 변화와 주변인의 언행에 늘 민감한 영적 감각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과 행동 그리고 판단과 결정에 있어서 성령의 세미한 인도를 민감하게 깨닫고 처신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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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절 축복의 통로가 될 것인가? 저주의 통로가 될 것인가?
밧세바는 아도니야의 말을 전하기 위해서 솔로몬에게 갑니다. 솔로몬은 어머니 밧세바에 대한 권위를 충분히 인정해 주고 있습니다. 밧세바는 아도니야의 청탁을 작은 일이라고 하면서 솔로몬에게 수넴 여자 아비삭을 아도니야의 아내로 주라고 청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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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의 이러한 행동이 어리석은 행동이든 계획된 행동 또는 지혜로운 행동이든 청탁을 이용하는 데서부터 이미 그 출발점이 부정적입니다. 이러한 청탁의 귀결이 결국 아도니야의 처형으로 이어진 것이라면 결과는 밧세바가 저주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밧세바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지 그는 이미 솔로몬에게 영향을 행사하고 있는 인물이기에 (19절에 ‘그가 솔로몬의 오른 쪽에 앉았다’는 표현은 왕에게 영향을 행사하고 일정 부분 권력을 행사 할 수 있는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면에 있어서 언행을 삼가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밧세바는 지금 아도니야에게는 저주의 통로가 되고 있고, 솔로몬의 정치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정적들이 제거되는 축복(?)의 통로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밧세바에 대한 평가가 없기 때문에 그의 행동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단정할 수 없지만 솔로몬이 어머니의 청을 따라 행한 것으로 볼 때 그 영향력은 분명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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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을 제거할 목적으로 하는 행동,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를 남용하거나 탐욕을 부리는 행동, 옳고 그름보다 자신의 목적 성취를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는 방법등은 우리가 지양해야 할 자세입니다. 작은 일이라도 그것 안에 우리의 탐욕을 투영해서도 안됩니다. 작은 일이라 할 지라도 사리 분별 없이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도 제대로 하지 않고 처신하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일들을 선악간에 분별하고, 인과 관계나 시초 그리고 결과에 대한 여러가지 상황들을 알아보는 일은 책임이 크고, 나의 결정에 대한 영향이 커질 때 그것이 아무리 사소해 보일지라도 신중하게 처신해야 합니다. 점점 맡겨진 자리가 영향력이 더 커질 때는 더욱 기도하며 근신하며 처신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 있는 자유를 누릴 줄 아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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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25절 여호와께서 세우신 집은 누구도 허물 수 없습니다.
솔로몬은 어머니의 청탁에 대해 분노하면서 아도니야를 위해 왕권도 구하고, 요압이나 아비아달을 위해서도 구하지 그러냐고 합니다. 이어 솔로몬은 또한 아도니야가 진정 아비삭을 달라고 했다면 그는 생명을 잃게 되리라 선언합니다. 이 일은 곧 반역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자신의 왕됨은 여호와를 통해서 세워진 것임을 확인하고 아도니야의 처형을 브나야에게 맡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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밧세바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결국 솔로몬의 왕권에 대해 도전했던 아도니야는 스스로 왕이 되려는 죄악이 들통나서 결국 죽게 됩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왕권에 대해서 여호와께서 허락하시고 세워주신 것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24절). 어머니 밧세바의 권위와 영향력 그리고 자신이 어머니의 청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판단되는 아도니야의 청탁을 파악한 솔로몬은 비록 자신의 말을 어기는 행동이라 해도 하나님의 권위로 아도니야를 제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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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신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며, 주님의 몸된 성전이며, 신랑되신 주님의 신부이며, 몸된 교회입니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도, 솔로몬 자신도 여호와께서 세우신 집이라를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반역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대처하고 신속하게 반응했던 것입니다. 스스로 왕이 되려 하지 아니하고, 사사로운 인정이나 다른 감정 때문에 불의와 타협하지 아니하고, 주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의지하며 순종하며 살아가길 기도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교회에게 공통적으로 다가오는 유혹이 바로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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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우리를 거룩한 성전으로 교회로 삼아주신 하나님 아버지
여전히 버리지 못한 탐욕을 버릴 수 있게 하옵시며
상황을 잘 분별하여 축복의 통로로 쓰임받길 원하오며
우리를 거룩한 전으로 교회로 세워 주신 주님의 뜻을 잘 분별하여
불의한 도전과 위협들과 시험에 단호하게 판단하며
거룩한 길로 나아가게 하옵소서.